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이번에 달항아리 못지않게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청화철화백자도 한 점 나왔다(사진 2).
특히 백파선이 없었다면 조선에 여성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문소영 기자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이 조선을 끔찍하게 파괴한 전쟁이 끝났을 때.『죄와 벌』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인간의 처참함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준다.
그다음부터는 동급생들 간에 ‘톨스토이 전문가 비슷한 별칭이 생겼다.그래서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았다.내가 1962년 하버드대에 머물렀을 때였다.